1일 환자 2명을 30명으로 늘렸다
친절한 설명 등 철두철미한 서비스에도 환자는 늘지 않아
지역 주민에 포스팅(Posting) 팸플릿 배포로 신규환자 증가

브레스트 클리닉 다치가와(도쿄 다치가와市)

‘이대로 가면 망합니다’ 2005년 12월 브레스트 클리닉 다치가와의 히로세 슈지 원장은 매달 업적분석 보고서를 받는 공인회계사 고문으로부터 이런 통보를 받았다.

히로세 원장은 2005년 1월 JR 다치가와(立川) 역 앞의 복합빌딩에 유방암 검진진료 전문인 유선외과(乳腺外科)의원을 개원했다. 그러나 개원한지 1년이 다 되어도 하루 외래 환자수가 2명뿐인 날도 있었다.

당연히 경상수지 적자가 매달 수십만엔씩 생겼다. 히로세 원장도 어려운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회계사의 경고를 비교적 냉정하게 수용했지만 ‘하여튼 필사적으로 힘써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돌이켜 보면 개원 준비는 치밀하게 수립하고 집행했다. 굳이 다치가와시에서 개원한 것은 히로세가 이곳 국립병원기구 재해의료센터에서 외과의사로 근무해 낯익은 고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소화기암 수술과 치료를 전담했던 히로세는 ‘외과의원을 개원해도 의사 혼자서 수술하기는 어렵고 환자 모으기도 힘들다’고 판단, 유방암 검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사회적 분위기 등을 감안해서 유선외과에 장래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히로세는 개원에 대비해 재해의료센터 근무 마지막 1년간은 유방암 환자 치료를 중심으로 담당을 바꿔서 진료기술을 연마했다. 이와 함께 앞으로 유선외과 클리닉을 개원하는 이상 직접 수술도 하고 고도의 치료를 하는 연대 협력 병원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도쿄도 내에서 유암 치료가 유명한 병원들을 직접 조사하고 그 중에서도 인기 있는 유선외과 전문의들과 연락을 취해 직접 방문하는 등 인맥 쌓기에 힘썼다.

예를 들어 국가공무원 공제조합연합회 도쿄 공제병원 유선과의 바바 노리유키 부장을 방문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개원한 뒤에는 환자를 소개하고 싶은데 어느 단계까지 우리 클리닉에서 진료하다가 넘겨줘야 하는가’라고 묻고 다른 이상이 발견되면 소개해 달라는 답변을 받는 등 서로 낯을 익히고 협력관계 구축을 추진했다.

개원할 때 인건비를 최대한 억제하는 일에도 치중했다. 스텝은 상근제인 진료방사선기사 1명과 사무직원 1명 뿐. 환자 채혈 등 병리검사도 직접 하기로 했다. 여성 방사선기사를 채용해 여성환자들이 유방검진 때 안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다만 맘모그라피와 초음파검사기기 등 의료기기들을 구입했기 때문에 개원자금을 금융기관에서 전액 융자로 충당해 5000만엔이 소요됐다.

서비스 중요시해도 환자 모집으로 연결 안돼
개원한 뒤에도 결코 평범한 진료에 안주하지 않았다. 유방암 검진에서 이상이 없는 환자에게도 그런 진단이 내려진 근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PC모니터 화면에 검사결과 화상과 악성종양인 경우의 화상을 동시에 올려서 차이점을 알리는 등 알기 쉬운 설명을 하는데 노력했다.

한편 정밀검사 등이 필요해 제휴하고 있는 병원으로 환자를 소개할 경우에는 ‘유방암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불안감이 생기는 환자의 심리를 배려했다.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면서 구축한 인맥을 살려 환자 자택에서 가까운 병원의 유명한 유선외과 전문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환자를 보낼 테니 선생님이 직접 진단해주기 바란다’고 특진을 의뢰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찾아갈 병원 주변의 지도와 접수 절차까지 환자에게 가르쳐주는 등 치밀한 서비스 제공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이토록 철두철미한 환자서비스 배려에도 불구하고 환자수가 늘지 않았다. 5000만엔의 부채를 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의원 문을 닫을 수도 없었다.

원장으로서의 보수는 한 푼도 못 받았고 수입은 오직 월 1회씩 맡아주는 병원 당직근무비와 약사인 아내의 급료 뿐이었다. 히로세는 세 자녀의 아버지이며 모두 학생이기 때문에 먼저 근무했던 재해의료센터의 퇴직금은 학비로 사라졌고 부모 유산도 써버렸다. ‘이대로 간다면 기본 생활도 지탱할 수 없다’. 그런 불안감이 히로세를 괴롭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문회계사가 최후통첩과 같은 경종을 울리던 무렵에 개원 이래 함께 고생한 스텝 2명도 퇴직했다. 이유를 둘러댔지만 경영이 힘들고 급여가 낮은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직원들이 나갔기 때문에 2006년 정초부터 경영은 외줄타기 상태였다. 처가 쪽 연줄로 어렵사리 사무직원을 보충하는 한편 방사선기사의 몫은 파견회사가 보내주는 기사에게 의지했다.

겨우 상근 방사선기사를 채용해서 의원 내부 체제가 정비된 것이 2006년 4월이었다. 그 후 환자 수는 서서히 증가되기 시작했고 하루 평균 10명을 넘는 날이 가끔 생겼다. 그러나 경영은 여전히 어려운 상태였다. 히로세는 한층 더 궁지로 몰렸다.

신규환자 확보하지 못한 것이 경영의 맹점
‘경영의 방향은 틀리지 않았는데. 그런데 어째서 환자가 늘지 않을까’. 히로세가 반복되는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은 한 번 내원한 환자가 다시 찾아오도록 온갖 정성과 서비스를 다해온데 반해서 신규 환자를 확보하는 노력과 배려는 부족했다는 사실이었다.

애당초 유방암 검진 등을 받기위해 고객과 환자가 우선 의원을 찾아와주지 않는다면 의원자체의 인지도가 높아지지 않고 세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환자들에게 알릴 수 없다. 더욱이 생활습관병 등 때문에 한 달에 두서너 번씩 내원하는 환자를 단골로 확보한 내과와는 달리 유선외과(乳腺外科) 클리닉은 환자가 다시 오는 내원 빈도 자체가 낮다. 유방암 검진에서 이상이 없다면 그 여성이 검진을 다시 받는 1년 뒤까지는 유선외과를 다시 찾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도 신규환자 확보 노력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렇다면 신규 환자를 어떻게 확보 할까.
히로세는 경영컨설턴트와 상담한 뒤 2006년 5월부터 다치가와 시내에서 통계상 여성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골라 포스팅(Posting: 홍보자료 우송이나 호별배포방식의 PR)을 전개하여 클리닉의 지명도를 높이기로 했다.

그리고는 포스팅을 실시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진료시간을 변경, 오전과 저녁 시간을 각각 연장하는 진료시간 변경안내를 클리닉 홍보 팸플릿과 함께 봉투에 넣어서 배포키로 했다. 방식은 포스팅 전문회사에 의뢰해서 2회로 나누어 총 4만5000세대에 PR자료 봉투를 투입했다. 비용은 50만엔이 들었다. 극도로 경영이 어려운 시기에 이 정도의 돈을 홍보비용으로 쓰는 것에 가슴이 쓰렸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결단을 계기로 유방암 검진을 받으러 찾아오는 신규환자가 늘기 시작해 평균 내원 환자수가 하루 평균 15명으로 급증했다. 경상수지도 처음으로 월 단위의 흑자를 실현했다. 캐슈플로우(Cash Flow: 세금공제 후 이익금에 감가상각비를 더한 금액. 재무내용의 건전성 지표)도 흑자로 돌아섰다.

그래서 히로세는 다시 한번 포스팅을 다치가와시(立川市)와 인접한 구니다치(國立)시와 하치오지(八王子)시까지로 확대해서 한 층 더 의원 경영의 안정화 기반을 도모했다.

시기가 이때쯤 되니까 정성스럽고 꼼꼼한 진찰을 하며 이상이 있으면 유명한 유선외과 전문의가 있는 큰 병원으로 소개 해준다는 호평이 입소문으로 널리 퍼져 다시 찾아오는 단골환자들도 부쩍 늘었다. 제휴 상대와의 신뢰관계가 이미 구축된 상태이므로 병원에 소개하는 유방암 환자를 수술한 뒤에 거꾸로 소개해주는 역소개(逆紹介) 환자도 늘었다.

이 결과 환자 수는 계속 증가했고 작년 말에는 하루 평균 30명에 도달했다. 월수입은 개원 당시의 4배인 약 670만엔에 이르렀다. 지금은 전자진료 차트의 첨단화 쇄신비용까지 마련할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히로세가 앞으로 주력하고 싶은 분야는 직원들의 처우개선이다. 개원 당시부터 여성환자의 프라이버시 문제를 각별히 배려해서 개별 룸의 탈의실을 설치하는 등 미흡했던 처우개선을 충실화시킬 계획이다. 히로세는 결과적으로 ‘포스팅 덕분에 환자가 증가해 참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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