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까맣게 그을린 종아리와 대조적으로 빛나던 하얀 발.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여자 프로 골퍼 박세리(34)를 보면 그의 하얀 발을 떠올린다. 어쩌면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장면일지 모른다.

1998년은 우리 국민들이 무척 아픔을 겪었을 때다. 외환위기(IMF) 직후라 국민들은 직장을 잃었고, 용기를 잃었고, 희망을 잃었다. 그해 7월 7일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US오픈. 추아시리폰과 접전을 펼치던 박세리는 연장 18번 홀에서 티샷한 공이 왼쪽으로 감기면서 연못 바로 옆 경사면 러프에 걸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오른손잡이인 박세리로선 도저히 정상적인 스탠스를 할 수 없던 상황. 하지만 그는 양말을 벗고 연못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친 공은 안전하게 페어웨이에 안착했다. 박세리는 결국 92번째 홀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웃을 일이 없었던 사람들은 박세리의 발을 통해 희망을 봤다.

비슷한 시기 야구 선수 박찬호(38·현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도 마찬가지. 혈혈단신 태평양을 건너 메이저리거가 된 그는 불같은 강속구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를 주무기로 산만한 덩치의 외국인 선수들을 연신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박찬호의 경기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TV 앞으로 몰려들었고, 박찬호의 공 하나하나에 환호성을 질렀다. 박찬호의 맹활약은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에너지였다.

3월 11일 도호쿠(東北)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이어진 원전 공포로 요즘 이웃나라 일본은 큰 혼란에 빠져있다. 수천 명이 사망했고, 수만 명이 실종됐다. 재산상 피해액은 산정조차 할 수 없다. 폐허가 된 일본에서도 스포츠는 한 줄기 희망의 꽃을 피우고 있다. 선수들은 앞장서 국민들의 힘을 북돋으려 하고, 생기를 잃었던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 삶의 의욕과 희망을 찾아간다.

요즘 일본 오사카 인근 고시엔구장에서는 제83회 센바츠고교야구대회가 한창이다. ‘봄의 고시엔’으로 불리며 전국 예선을 거친 32개 학교가 출전하는 대회다. 32개 팀 중 가장 주목받는 팀은 지진 피해가 가장 컸던 미야기 현 센다이 시에 있는 도호쿠 고교다. 이 고교 야구팀은 대지진으로 대회 출전 자체가 힘들 뻔했다. 지진이 나자 선수들은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 대신 물통과 빗자루를 들고 자원봉사를 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나섰다. 주민들은 ‘실의에 빠진 도호쿠에 용기를 주기 위해 꼭 뛰어달라’ ‘위축되지 말고 도호쿠의 저력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23일 일본 서부 도시 니시노미야에서 열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개회식에서 참가 선수단이 묵념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3월 28일 도호쿠 고교는 기후 현 대표인 오가키 니치다이고교와 첫 경기를 치렀다. 선수들은 모자 안쪽에 ‘2011·3·11·동일본대지진’이라는 글자를 새기며 각오를 다졌지만 경기에선 0-7로 졌다. 하지만 이날 경기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3루 측 도호쿠 고교 응원단에서는 ‘힘내자 도호쿠, 힘내자 미야기’라는 구호를 외쳤다. 1루 측 오가키 니치다이고교 응원단의 응원 구호는 ‘힘내자 일본’이었다. 이 같은 구호 속에 구장을 가득 메운 2만7000명의 관중들은 모두 하나가 됐다.

프로 선수들 역시 연일 기부와 자선 활동 등으로 국민들에게 힘을 주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이치로 스즈키는 1억 엔(약 13억 6000만 원)을 선뜻 내놓았고,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하세베 마코토는 자기가 쓴 책의 인세 전액을 기부금을 내놓기로 했다. 박찬호와 이승엽(이상 오릭스), 프로골퍼 김경태(신한금융그룹), 배구 선수 김연경(JT 마블러스) 등 일본에서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도 기부 대열에 동참했다.

사람 뿐 아니다. 일본 경주마가 세계 최고의 경마대회 중 하나로 꼽히는 두바이 월드컵 클래식에서 1위를 차지한 것도 일본 국민들에겐 큰 힘이 되고 있다. 일본 경주마인 빅토아르 피사와 트랜센드는 27일 두바이에서 열린 제16회 두바이 월드컵에서 일본 경주마로는 처음으로 1, 2위를 휩쓸었다.

얼마 전 만난 조광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최근 지진 피해 성금 모금을 위해 한일 축구대표팀 간 자선경기를 열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조 감독은 완곡하게 이를 거절하고 있다. 조 감독은 “승부의 세계에서 일부러 져 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런데 한국이 이기게 되면 안 그래도 실의에 빠진 일본 국민들은 어떤 심정이겠나. 뜻은 좋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일전이 정상적으로 열릴 때쯤이면 일본 국민들의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었을 것이다. 그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용기와 희망을 전하는 스포츠의 역할은 계속될 것이다.

※ 이헌재는?

이헌재(37)는 현재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때 태극전사들의 몸과 관련된 기획으로 제38회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야구와 골프 등을 담당하고 있으며 스포츠의 재미와 감동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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